
지난날의 보랏빛 저녁
어느 날, 그냥 걷고 싶었다.
어디든 좋았고,
아무 말 없어도 되는 그런 공간이면 됐다.
그렇게 발길 닿은 길 끝에서
나는 보랏빛 들판을 만났다.
햇살은 천천히 기울고 있었고,
바람은 부드럽게 어깨를 스쳐갔다.
보라색 꽃들이 언덕을 따라 끝없이 피어 있었고,
그 사이로 난 오솔길은
마치 지난 기억을 따라가는 길 같았다.
그 길을 걸으면서 문득,
잊고 있던 얼굴이 떠올랐다.
한때는 너무도 선명했던 이름,
지금은 흐릿하게 남아 있는 그 웃음.
시간은 참 조용히 모든 걸 바꿔놓고,
우리도 모르게 멀어지게 한다.
사진을 찍어보지만,
이 공기와 이 기분까지 담을 수는 없다는 걸 알기에
그냥 눈으로 오래 바라봤다.
꽃이 흔들릴 때마다
가슴 한쪽도 같이 흔들렸고,
지는 해가 붉게 물들 때
어디선가 마음도 조금 따뜻해졌다.
사람 많은 곳도,
무언가를 꼭 해야만 하는 날도 아니었다.
그저 나 하나, 풍경 하나.
충분한 하루였다.
그날 이후로
나는 가끔 다시 그 들판을 떠올린다.
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괜찮았던 시간,
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
위로가 되었던 그 순간.
살면서 그런 장면이
몇 번이나 있을까.
그래서 더 오래 기억하고 싶다.
그래서 이렇게 남겨둔다.
내 지난날의 보랏빛 저녁을.